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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복음 7] 눅 1:67-80 빈들로 인도하는 사가랴의 예언
    기독교_ 기독교/누가복음 2023. 6. 1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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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 7] 눅 1:67-80 빈들로 인도하는 사가랴의 예언

    가브리엘의 말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브리엘의 말을 의심했던 사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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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의 말대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브리엘의 말을 의심했던 사가랴는 말하지 못하는 자가 되었으나 엘리사벳의 출산을 보며 믿음을 가져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다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10개월간 말하지 못하던 사가랴는 다시 말을 하게 되자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예언을 하였습니다. 우리말로 '예언'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언의 시점이 미래에 맞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복음에 대한 선포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예언서로 알려진 구약의 책들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먼저 과거에 대한 시점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고 언약을 맺었다 말합니다. 현재에 대한 시점에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허락한 율법을 어겨 언약을 깨뜨렸다 말합니다. 미래에 대한 시점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고 그 후에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할 것이라 말합니다. 예언이 미래를 말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바울은 예언과 방언이 같은 내용을 말한다 생각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큰 일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 이해했습니다. 이때 언어적인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나타나고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 예언을 하면 책망 받은 자가 자신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므로 하나님께 엎드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따라서 사가랴의 예언은 미래의 일어날 일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는 사가랴의 예언을 살펴보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먼저 68-75절은 찬양의 이유를 밝히는 부분으로 하나님이 약속을 지켜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말합니다. 76-79절은 사가랴의 아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그가 주의 길을 인도함으로 죄를 용서 받는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로 일어날 것이라 말합니다. 사가랴는 과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현재 지켜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고 미래에 죄인들의 구원을 완성할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때문에 사가랴의 예언에는 늦은 나이에 얻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언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세례자가 될 것임에 대한 말도 없습니다. 오로지 사가랴의 예언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입니다. 갓태어난 자신의 아들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예수님이 주인공이라 말하였습니다. 예언을 점쟁이의 점괘처럼 행하지 않고 예언을 예언답게 선포하였습니다.

     

    사가랴의 예언은 찬양으로 시작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돌보사 속량하시기 때문입니다.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사가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았다 말합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돌봄으로 고난 받고 억압 받는 삶에서 자유를 얻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속량으로 나타난다 말하고 있습니다. 속량은 잠시 죄를 덮어두는 속죄와 다릅니다.

     

     

     

     

    속량은 죄를 완전히 없애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속량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3번 사용됩니다. 그 중에 두 번에 누가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서 9:12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제사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갔다 말합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여기서 사용된 속죄가 속량을 뜻하는 헬라어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은 해마다 드리는 제사는 죄를 임시적으로 덮어두는 속죄라고 말하며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고 단지 기억하게 하는 기능만 한다 말합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이 갚아야 합니다. 죄를 지어 감옥에 가야 할 때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나 고양이를 대신 감옥에 넣는다고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사람이 죽어야 할 때 황소와 염소가 아닌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 보냈습니다. 우리 중 하나가 되게 하여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불하게 하였습니다. 속죄로 하루 하루 연명하던 자에게 속량의 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되는 삶을 허락하였습니다.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사가랴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으로 해마다 제사를 드렸지만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속량되어 완전해질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가랴는 죄를 속량하는 예수님이 다윗의 집에서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서 일으켰다 말했습니다.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지난 시간 살펴본 마리아는 구약의 말씀을 공의가 아닌 긍휼로 깨달았습니다. 사가랴도 구약의 말씀이 공의가 아닌 긍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러번 살펴본 것처럼 공의와 긍휼은 반대의 개념입니다. 공의는 선과 악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을 말하고 긍휼은 불쌍히 여겨 돌봐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공의로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선과 악을 공정하게 판단해 원수와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의 손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 원수와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합니다. 누구도 율법을 앞세운 공의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공의로 죄인이 된 자를 긍휼로 구원하겠다 말합니다. 죄의 값인 사망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불해 원수와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원수와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할 자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보내주겠다 맹세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고 아브라함의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되며 아브라함의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한다 말씀하였습니다. "창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맹세는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에게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므로 변하지 않겠다 말씀하였습니다. 그 맹세는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며 하나님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한다 말씀하였습니다. "시 132:11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 12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 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 14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 15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 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 17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 18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구약에서 뿔이라는 것은 힘 또는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 힘과 능력을 가진 자가 태어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뿔로 태어날 자는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מָשִׁיחַ(메시야) 입니다. 이를 헬라어로 바꾸면 그리스도가 됩니다. 곧 다윗의 뿔로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마태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소개한 것처럼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맹세한 것을 항상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달리 맹세한 것을 반드시 지키는 하나님이 자신이 약속한 맹세를 지켜 원수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임을 믿은 것입니다.

     

     

    사가랴의 예언은 자신의 아들 세례자 요한에게 이어집니다. 사가랴에게 세례자 요한은 매우 귀한 아들입니다. 자녀가 없어 늦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자녀를 달라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얻은 아들이 세례자 요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세례자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 일컬음을 받을 것이나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삶을 살 것이라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연으로 밀려날 때 주연으로 드러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예수님이 행한 일로 죄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됨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예수님은 위로부터 임하는 돋는 해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를 평강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쳤다고 말하였습니다.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빛을 보내어 낮과 밤을 만들었던 하나님이 흑암에 행하여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예수님이라는 돋는 해를 보내줍니다. 예수님이라는 돋는 해는 이 세상을 비춰 길 잃은 자를 평강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흔들리지 않는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약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뜻이 속죄와 공의에 있다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따라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드리면 자신의 죄를 용서 받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하나님을 만족시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가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가랴도 구약의 말씀을 읽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속죄가 아니라 속량에 있고 공의가 아니라 긍휼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속량과 긍휼을 위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자손이 다윗의 집에 태어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세례자 요한이 다윗의 집에 태어나 돋는 해로 사망과 어둠을 비쳐 평안의 길로 인도할 자를 증거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갓태어나 아이였고 마리아의 자녀 예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사가랴는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의 구원을 이미 보고 누린 것처럼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사가랴 안에 가득 했기 때문입니다.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며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이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에서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마리아를 만났고 누가복음 1:35에서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잠언 16:9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라 말하였습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리고 마리아가 세례자 요한을 낳아 주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을 낳아 죄의 문제를 해결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사도된 오늘의 자신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 말합니다. 사도의 삶을 살았지만 그 삶을 인도한 것은 하나님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따라서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의 오늘도 우리의 수고와 열심으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값 없이 거저주시는 은혜를 따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계획했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실행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마음으로 정한 악한 길을 선으로 바꿔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는 성령은 세례자 요한의 걸음도 인도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장하며 심령이 강해졌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살았습니다.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심령이 강해졌다는 말의 심령은 보통 세례자 요한의 마음으로 해석됩니다. 공동번역은 "아기는 날로 몸과 마음이 굳세게 자라났으며" 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마음이 굳세어지고"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심령을 세례자 요한의 마음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심령이란 단어는 마음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성령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심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성령의 뜻도 가지고 마음의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1:80를 살펴보면 심령에 해당하는 단어가 대문자로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Luke 1:80 ¶ Τὸ δὲ παιδίον ηὔξανε καὶ ἐκραταιοῦτο Πνεύματι, καὶ ἦν ἐν ταῖς ἐρήμοις ἕως ἡμέρας ἀναδείξεως αὐτοῦ πρὸς τὸν Ἰσραήλ. 일반적으로 심령에 해당하는 프뉴마는 소문자로 쓰일 때는(πνεῦμά) 사람의 마음으로 해석하고 대문자로 쓰일 때는(Πνεύματι) 성령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자라며 성령이 강해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나은 해석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성령이 강해졌다는 것은 지금까지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의 경우처럼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구원이 사람의 행위와 열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게 되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기까지 빈 들에서 살았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빈 들로 나가 살아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그의 부모는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혈통 엘리사벳으로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이 되기 위해 성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 복음을 깨닫게 되자 세례자 요한은 성전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사가랴가 깨달은 것처럼 성전에서 행하는 속죄의 제사로 죄를 없앨 수 없고 위로부터 오는 돋는 해로 속량의 제사를 드려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빈 들에 머물렀습니다. 빈 들은 일반적으로 광야로 해석됩니다. 새번역,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은 모두 빈 들을 광야로 번역하였습니다.

     

     

     

     

    광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머물다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장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여호수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최적의 장소로 나간 것입니다. 비록 그 땅에 먹을 것이 많지 않아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입을 것이 많지 않아 약대 털 옷을 입을 지라도 세례자 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빈 들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같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빈 들 혹은 광야에 머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높고 높은 보좌를 떠나 낮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쓸데 없다 말씀하시며 죄인을 찾으러 왔다 말씀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말씀하였습니다.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울도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말하였습니다. "롬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은 높아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낮아지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말한 것입니다. 침몰하지 않는 배는 많은 것을 쌓고 담아 출항합니다. 하지만 침몰하는 배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쌓고 담은 것을 바다에 던져 버립니다. 죄로 인해 침몰하는 배에 올라탄 우리도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내려가는 것보다 느리지만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춰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또한 죄인을 찾으러 오신 예수님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주어 그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을 주어 죄인 됨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주어 새 계명으로 죄인 됨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일곱번씩 일흔 번보다 더 많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겨 목숨 마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준이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 없는 우리의 죄가 철저히 드러나고 예수님이 찾는 자가 바로 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Jesus Stand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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