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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 눅 2:8-40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기독교_ 기독교/누가복음 2023. 6. 12. 09:52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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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 눅 2:8-40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
지난 시간 우리는 베들레헴에 태어난 예수님에 대해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으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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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우리는 베들레헴에 태어난 예수님에 대해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으로 시작된 호적을 행하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이때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되었으나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 왔으나 머물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머무는 곳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로 부름 받은 성도는 머리 되신 예수님을 따라 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신 후 우리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긴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과 예수님 : 점층 병행법

누가복음 1:5-2:52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모습은 점층 병행법으로 나타납니다. 점층 병행법이란 비교 가능한 이야기를 나란히 소개하며 앞의 것보다 나은 뒤의 것을 소개하는 방법입니다. 즉 누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나란히 비교하며 세례자 요한보다 나은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는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보면 더 확실히 집니다. 눅 1:5-25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의 아내가 임신하여 세례자 요한을 낳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말하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26-38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도 임신하여 예수님을 낳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와 달리 자신이 임신할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믿었습니다. 출생의 출발부터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나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1:39-56은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이때 임신한 엘리사벳은 임신한 마리아를 축복하고 마리아는 자신을 임신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임신한 상태였으나 모든 관심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7-66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할례 그리고 이름짓기를 소개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말대로 사가랴는 엘리사벳을 통해 아이를 낳았습니다. 할례를 행할 때 세례자 요한의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누가복음 2:1-21도 예수님의 출생과 할례 그리고 이름 짓기를 소개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났고 할례를 행할 때 예수님의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것은 점층 병행되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웃과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출생하여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눅 1: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과 친척은 고사하고 누울 곳 조차 없어 구유에 몸을 맡긴 채 출생하였습니다. "눅 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세례자 요한의 곁을 지킨 이웃과 친척이 예수님의 곁에는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나야 할 예수님의 출생이 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쓸쓸하고 외로운 예수님의 태어남을 빛과 어둠의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빛 되신 예수님이 자기 땅에 왔으나 세상이 예수님을 알지 못 했고 영접하지 않았다 말하였습니다."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들 중 누군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말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외면할 때 예수님의 곁으로 나오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원한다고 예수님의 곁으로 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만 예수님의 곁에 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를 보냈습니다. 주의 사자는 목자들에게 좋은 소식으로 예수님의 태어남을 알렸습니다. 목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그 이루어짐을 보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외로운 예수님의 첫 손님이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예수님은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성령과 함께 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안나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로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선지자였습니다. 머리 둘 곳 없어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의 곁에 하나님이 목자들과 시므온과 안나를 보내주었습니다.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목자들과 시므온과 안나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들이 세례자 요한의 이웃과 친척보다 더 나은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
예수님이 생각하는 이웃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살며 서로 왕래하는 사람을 이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로 인해 거의 죽어 있는 사람을 자신의 이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0장에 소개되는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에 잘 나타납니다. 어떤 율법교사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비유는 강도를 만난 한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를 외면했다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실 같은 일을 하는 자들로 이들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부정하다 생각했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었습니다. 거의 죽게 된 그를 치료해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마친 후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은 율법 교사에게 강도 만난 자가 곧 율법교사이고 예수님이 그의 이웃이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자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신 예수님이 죄인을 자신의 몸처럼 여겨 죄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웃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 입니다. 죽음이 코 앞에 있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가 예수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친척도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같은 혈통의 사람들을 친척이라 생각합니다. 물보다 진한 피가 섞인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를 자신의 가족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12장에 소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잘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대화하기를 원한다 말했습니다. "마 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그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라고 말한 후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가족의 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의 관계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아들로 여기라 말하였고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자신의 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라 말하였습니다. "요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남이었던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가족으로 거듭 났습니다. 예수님에게 친척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웃과 친척은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형성된 관계입니다.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이었던 엘리사벳의 피를 나눈 자들이 그들의 친척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제사장들은 집단거주를 하였기에 많은 제사장들이 인간적인 정을 나눈 이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은 하나님의 뜻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혈통적으로 생각하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아 가족이라 할 수 없고 육정으로 생각해도 가까이 살지 않아 이웃이라 말할 수 없지만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자들과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이 되었습니다. 이웃과 친척의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이들을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이웃과 친척이 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라는 비유를 통해 이 사실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한 임금이 종들을 보내 아들의 혼인잔치에 올 것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청한 자들이 오기를 싫어 했습니다. 다시 한번 다른 종들을 보내 청한 자들이 올 것을 요구했으나 그들이 돌아보지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 태웠습니다. 그 후에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이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 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잔치에 청하라 명하였습니다. 종들은 임금의 말대로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대로 모두 혼인잔치에 데리고 왔습니다. 혼인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님 중 한 사람이 결혼식에 적합한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 했습니다. 결국 임금은 종들에게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말하였습니다.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허락한 후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 말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자기 밭과 자기 사업을 위해 이를 거절하고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모욕하고 살해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을 심판했습니다. 계속해서 기회를 주었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자를 뒤로 하고 새로운 언약을 허락하였습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를 판단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복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청함을 받아 교회에 나왔을지라도 택함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말씀하였습니다. 청함을 받아 교회에 나왔으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을 옷으로 입은 자는 적다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따라서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 좁은 문을 통과해 청함을 넘어 택함을 입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오병이어를 먹은 무리에 머무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곁에서 이웃과 친척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먼저 달라 말한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허락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떠나 먼 나라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고 싶어도 주는 자가 없어 먹지 못 했습니다. 이때 그는 아버지에게는 배 불리 먹는 품꾼도 많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 말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품꾼의 하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비록 둘째 아들은 아들이 되기에 자격 없는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다시 아들로 품어 주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비난과 원망에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014년 4월 16일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부근에서 침몰했습니다. 이 배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안산시 단원고의 학생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진도로 향했습니다. 이때 부모님들의 바램은 딱 하나였습니다. 그들의 자녀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물에 젖은 핸드폰이나 가방이나 옷가지를 걱정하는 부모님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녀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 걱정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사랑하는 자녀만 돌아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무사히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곁에 서기에 자격 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자격 있는 예수님을 보내주심으로 우리를 예수님의 이웃과 친척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불러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자들과 시므온과 안나가 수 많은 사람들 중 부름 받아 예수님 곁에 선 것처럼 우리도 흐르고 흘러 예수님의 곁에 서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빛이 어둠을 비출 때 어둠을 가지고 빛 앞에 서는 빛으로 부름받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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